![우리동네이야기 광장동](https://blog.kakaocdn.net/dn/bl9ZW2/btsIUlMQVPO/rsrpmRAjsfyxrApMzpk1U0/img.png)
광장동, 역사와 시간이 켜켜이 쌓인 곳
삼국시대, 승패를 좌우했던 전략적 요충지
삼국시대, 한강 유역을 둘러싼 치열한 영토 다툼 속에서 광장동은 그야말로 승패를 좌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백제의 수도 하남위례성을 보호하는 아차산성은 광장동 북쪽에 위치하며, 백제와 고구려의 끊임없는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개로왕이 전사하고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아픈 역사도 이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 시대에는 신라의 영토가 되었지만, 고구려 영양왕 시대에는 온달 장군이 고토수복을 위해 아차산성을 공격하다가 전사하는 비극적인 사건도 일어났고,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바탕으로 광진구의 마스코트는 평강공주와 온달이 되었고, 광장동은 삼국시대의 영웅들이 숨 쉬었던 곳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고려시대, 서울 북부의 중심지로 부상
고려시대에는 광장동에 양주군 읍치가 위치하며 서울 북부의 중심지로 부상했는데, 광나루는 양주를 대표하는 나루터였으며, 현재에도 양진초등학교와 양진중학교라는 이름으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이 수도로 정해지면서 광장동은 한성부의 북쪽 관문 역할을 했습니다. 광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광나루는 조선시대에도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조선시대 이후,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다.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 장의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이곳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인근의 광진리, 산의동 일부와 통합되어 광장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고, '광장'이라는 이름은 당시 통합된 두 마을, 장의동의 '장'과 광진리의 '광'을 합쳐 만들어졌습니다.
광진리는 넓은 강을 뜻하는 '광진'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에 광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나루터이기도 했으며, 강폭이 넓어 배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곳이었는데, 한강변에 위치하여 예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광장동은 많은 변화를 겪었는데, 1949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고, 1950년 광장동으로 개칭된 후, 1955년에는 구의동과 함께 광의동으로 통합되기도 했으며, 1977년 다시 광장동으로 분리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1995년 성동구에서 광진구가 분구되면서 광장동은 광진구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광장동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지명을 넘어,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상징물처럼 여겨지고 있고,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역사와 한강이라는 자연환경이 어우러져 독특한 지역 문화를 형성했으며, 이는 오늘날 광장동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오늘날 광장동은 과거의 흔적과 미래를 향한 발전이 공존하는 매력적인 도시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유적과 현대적인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한강변을 따라 조성된 공원은 시민들에게 휴식과 여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광장동, 이곳에는 역사가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아차산성을 방문하여 삼국시대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한강변을 따라 산책하며 자연과 도시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모습을 감상해 보세요. 광장동은 단순한 주거 공간을 넘어, 우리에게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을 제공합니다.
광나루 이야기
광장동 기본현황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은 39통 304반으로 이루어져 2024년 7월 기준 인구 33,863명, 세대수 11,843세대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북쪽으로는 아차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한강 공원이 인접해 있어 주민을 비롯해 서울 시민 다수가 찾는 지역이며, 봄철에는 워커힐 호텔 주변의 벚꽃으로 유명한 지역입니다.
광장동 여우골 이야기
광장동에는 ‘여우골’ 또는 ‘여시골’이라 불리던 곳이 있었습니다.
지금으로 보면 아차산 자락의 '장로회 신학대학교'가 위치한 부근입니다.
옛날부터 망우산, 아차산 인근은 명당으로 소문이 나있었기 때문에 무덤으로 많이 사용하였는데 아차산과 망우산 일대에는 무덤도 많았지만 여우도 많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우들이 아무렇게나 무덤을 뚫고 들어가 자기네 집처럼 드나들었다 해서 '여우골'이라는 지명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여우골에는 사람으로 변한 여우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지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이야기 중의 하나가 '여우가 변한 새어머니와 남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차산 남쪽 기슭에 있는 산의마을(광진구 구의3동 일대)에 연자방앗간을 운영하는 젊은 부부가 어린 남매와 함께 살고 있었다. 이들 부부는 부지런히 일해서 대문간까지 세운 번듯한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병들어 그만 일찍 죽고 말았다. 혼자 남은 남편은 어린 남매를 키워야 하기에 새 아내를 맞이하였다. 새 아내를 맞이하고 한 해가 지나갈 무렵이었다. 잘 자라던 남매 가운데 동생이 갑자기 아팠다.
인근에 유명하다는 의원에게 보여도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그러더니 며칠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 가운데는 “죽은 엄마가 딸을 데려갔을 거야!”라며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그런데 동생이 죽자 남매에게 잘해주던 새어머니가 갑자기 “죽은 아이를 집안에 오래 두면 안 되니, 빨리 산에다 가져다 묻어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하는 수 없이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죽은 동생을 누비이불에 말아서 집을 나섰다. 이때 오빠가 몰래 따라갔다.
어른들은 동생의 시신을 지게에 지고 아차산 여우골로 갔다. 무덤들 사이를 지나 조금 틈이 있는 평평한 곳에 땅을 파고 동생을 묻었다. 그리고 조그마한 봉분을 한 개 만들어주고는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오빠는 소나무 아래서 동생의 시신을 묻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오빠는 성의 없게 동생의 시신을 묻는 것을 보고 서글펐다. 그리고 동생 생각에 용기를 내어 동생 무덤을 찾아갔다. 낮에 자신이 앉아 있던 소나무에 다다랐을 때, 누이동생 무덤으로 무언가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바로 ‘백여우’였다. 백여우는 갑자기 울부짖더니 동생의 무덤을 파기 시작했다. 오빠는 돌을 하나 들어 백여우에게 던졌다. 한편, 돌에 맞은 백여우는 갑자기 몸이 커지더니 소복을 입은 여인으로 변했다. 놀랍게도 백여우는 새어머니였다. 새어머니는 “너였구나. 어떻게 왔니?”라고 물었다. 오빠는 “어른들이 동생을 대충대충 묻은 것 같아서요”라고 하였다. 새어머니는 “나도 걱정이 되어서 와 보았단다.”라며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때 오빠 눈에 새어머니 치마 속에 감추고 있던 여우꼬리가 보였다.
오빠는 돌을 들어 새어머니가 된 여우에게 던지고, 여우꼬리를 잡아 나뭇가지 사이에 메쳤다. “뿌둑”하는 소리와 함께 백여우는 목이 부러진 채 나뭇가지 사이에 끼어서 죽었다. 그러자, 무덤 속에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오빠는 땅을 파고 누비이불을 제쳤다. 누이동생이 살아 있었던 것이다. 오빠는 누이동생을 부축해 여우골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무덤과 여우가 많았던 여우골에는 ‘사람으로 변한 여우’와 관련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광나루
광나루는 '광주로 가는 나루'라는 뜻으로 천호대교와 광진교가 없던 시절, 한강을 건너 경기도 광주군으로 가는 데 자주 이용되는 나루였기 때문에 붙은 이름입니다.
강원, 충청도 지역의 곡류 및 목재등의 운송은 물론 행인과 상인이 한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좌수참을 두어 별감을 파견해 세곡을 관리, 감독하고 범죄자의 출입을 감시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강폭이 넓어 '너븐나루'라고도 불렀으나, 1936년 광진교가 생기면서 광나루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광진교 아래에 자리한 광진 정도도서관 앞에서 겸재 정선이 그린 '경교명승첩'중 '광진(廣津)'의 사본을 볼 수 있는데, 정면의 아차산 아래로 언덕과 모래톱이 어우러져 있는 광나루의 모습과 한강을 오가는 나룻배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광나루는 조선시대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장소입니다. 조선 전기의 서거정과 조선후기의 다산 정약용 등 다수의 문인이 시를 통해 광나루의 옛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했습니다. 특히 시에 능하던 서거정은 광나루 인근에 수시로 나와 시를 읆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종횡으로 엇갈린 수륙의 길목 / 縱橫川陸道
강가 버들 도성 문 연이었다네 / 岸柳接都門
마소는 배가 작아 서로 다투고 / 牛馬爭船小
어룡은 시끄러운 물이 싫으리 / 魚龍厭水煩
마음이 툭 트이네 드넓은 들판 / 曠心方大野
눈이 크게 뜨이네 모두 큰 정원 / 駭矚盡名園
붉은 누각 저 멀리 어른거리니 / 紫閣依然見
떠들썩한 도회지 소리나는 듯 / 如聞市陌喧
다산 정약용 - 다산시문집 제1권/시(詩)
乾坤納納一江湖
千里渾成水墨圖
白鳥巨邊收明滅
靑天盡處山有無
古垣松菊餘三徑
夢里桑麻老一區
步履看看將落日
雨旅花氣潤如水
廣津村墅晩眺- 서거정
건곤납납일강호(乾坤納納一江湖) 천지간의 좋은 경치 강호상에 들어오는데
천리혼성수묵도(千里渾成水墨圖) 천리나 넓은 안계(眼界)가 수묵화를 펼쳐 놓았구나
백조거변수명멸(白鳥巨邊收明滅) 갈매기 날아 가는데 수면이 밝았다 어두었다
청천진처산유무(靑天盡處山有無) 푸른 하늘 저끝엔 산이 보인다 말다 하네
고원송국여삼경(古垣松菊餘三徑) 고원의 소나무 국화는 옛날 선비 서성대던 길이요
몽리상마노일구(夢里桑麻老一區) 몽리의 뽕나무 삼밭은 오랜 옛날의 한 마을이라네
보이간간장낙일(步履看看將落日) 한걸음 두걸음 보고 또 보노라니 벌써 해 서산에 지려는데
우여화기윤여수(雨旅花氣潤如水) 비 지난 뒤의 꽃기운이 젖처럼 흐르누나.
광진촌서만조- 서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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