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보다 무서운 것은 뜻이 없는 것이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이 말하는 진짜 빈곤

“어떻게 하면 공부를 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의 고민이자, 부모 세대의 소망이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른 질문 앞에 서 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가?” 혹은 “애써 노력하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는가?” 오랜 시간 동안 당연하게 여겨졌던 ‘노력의 가치’가 흔들리고 있다. 인공지능의 부상, 계층 이동의 어려움, 경쟁에 지친 마음들 앞에서 노력은 종종 낡은 미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럴 때 떠오르는 고사성어가 있다. 바로 형설지공(螢雪之功)이다. 반딧불과 눈빛으로 책을 읽었던 두 소년의 이야기—진나라의 차윤(車胤)과 손강(孫康). 이들은 가난했지만 지식에 대한 갈망과 의지로 환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형설지공’은 고생담이 아니라, 뜻을 품은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성취의 본질을 상징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 이야기는 종종 “옛날에는 가능했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는 냉소적인 말 속에 묻히고 만다.

 

정말로 형설지공의 시대는 끝났을까?

아니면 우리가 잊어버린 어떤 정신이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고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질문을 던지고 있는가?

 

이 글은 ‘가난보다 무서운 것은 뜻이 없는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형설지공이 전하는 진정한 빈곤의 의미를 성찰하며, 노력의 미화를 넘어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오늘의 우리는 정말로 뜻을 품고 있는가?

 

형설지공(螢雪之功), 뜻이 있는 고생은 고생이 아니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은 네 글자 속에 한 시대의 삶의 태도, 그리고 인간 정신의 힘을 응축한 명구다. 먼저 이 말을 풀어보자.

  • 螢(형): 반딧불. 여름 밤, 미약하지만 어두운 공간을 밝혀주는 자연의 불빛.
  • 雪(설): 눈. 겨울의 차가운 풍경이지만, 하얗게 반사되는 빛은 독서에 활용될 수 있는 빛의 근원.
  • 之(지): 연결어로, 앞의 두 이미지를 뒤따르는 ‘공’과 연결해주는 문법적 장치.
  • 功(공): 공로, 노력 끝에 이루어진 성취. 행위가 아니라, 목표와 방향성을 가진 지속적 실천의 결과물이다.

이 말은 두 고사에 기반한다. 진나라의 차윤(車胤)은 여름 밤 반딧불을 모아 비단 주머니에 담아 책을 읽었고, **손강(孫康)**은 겨울밤 눈빛에 반사되는 희미한 밝음으로 독서를 이어갔다. 이들은 가난했고, 불리한 환경 속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을 원망하기보다, 그 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았다.

 

형설지공은 ‘노력의 서사’가 아니라, 그것은 의지의 철학이며, 가난이 곧 한계는 아니라는 신념의 표현이다. 이 고사에서 특히 주목할 단어는 ‘공(功)’이다. ‘공’은 고생만을 뜻하지 않고, 반복되는 행동 속에서 의미를 지키는 것, 그 방향이 어떤 ‘뜻’과 연결되어 있을 때 비로소 성취로 완성된다.

 

오늘날, 우리는 ‘노력’이라는 단어에 피로감을 느낀다. 과로사회, 수저 계급론, ‘해도 안 되는 세상’이라는 회의가 사람들을 지배한다. 그러나 형설지공은 ‘노력은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공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뜻이 있는 고생은 고생이 아니며, 그 자체로 인간을 단련하고 성숙하게 만든다는 삶의 철학이다.

 

이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노력의 ‘성과’가 사회적으로 불균등하다고 해서, 노력의 ‘가치’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질문해야 할 것은 “왜 노력하느냐?”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싶은가?”다. 형설지공은 이 물음에 대한 응답이자, 그 여정을 향한 태도이다.

 

뜻 없는 시대에 형설지공은 어떻게 가능한가

형설지공의 본질은 ‘환경’이 아니라 ‘의지’에 있다. 차윤이나 손강이 남긴 것은 고작 반딧불이나 눈빛을 활용한 공부법이 아니다. 그들은 절망 속에서도 뜻을 잃지 않은 사람이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형설지공은 ‘의지’의 존재 방식에 대한 은유다.

 

‘의지’란 무엇인가?  욕망이나 감정이 아니다. 의지는 인간이 스스로를 향해 던지는 질문이며, 그 질문에 대한 자기 응답이다. “나는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이 나를 인간답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반복적으로 자신을 다지는 행위가 바로 의지다.

 

이제 우리는 이 고사를 21세기의 풍경 속에서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 스토리텔링: 서울의 새벽, 한 청년의 이야기

서울의 어느 고시원, 새벽 4시. 열평도 안 되는 좁은 방 안에서 27세의 청년은 조용히 컴퓨터를 켠다. 그는 비정규직으로 일하면서 밤에는 UX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온라인 강의를 듣는다. 알바비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주말에는 디자인 과제를 제출하느라 잠을 줄인다.

 

그에게 누가 “그렇게까지 해서 되겠어?”라고 묻는다. 그는 웃으며 말한다. “해도 안 되는 세상이라지만, 안 하면 더 안 되니까요. 저는 제가 뭘 위해 살고 싶은지는 분명히 알고 있어요.”

 

이 청년에게는 반딧불도, 눈빛도 필요 없다. 그의 방을 밝히는 것은 노트북의 희미한 불빛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안에 깃든 방향 있는 의지다. 이것이 오늘날의 형설지공이다.

◾ 뜻 없는 사회의 문제

현대 사회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워졌지만, 정작 ‘왜’에 대한 답변을 잃어버렸다. 학교는 ‘어떻게 공부할 것인가’는 가르치지만, ‘왜 공부해야 하는가’에 대해 침묵한다. 기업은 효율성과 성과를 요구하지만, 구성원이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은 잃어간다.

그 결과, 많은 젊은이들이 무기력에 빠진다. 이것이 진짜 빈곤이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방향이 없어서 무너지는 삶. 가난보다 무서운 것은 뜻이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우리를 강제로 무기력하게 만들지는 않지만, 뜻 없는 사회는 조용히 사람을 포기하게 만든다.

◾ 오늘날의 형설지공은 무엇인가?

현대적 형설지공은 구체적인 실천으로 가능해진다. 그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아래와 같은 삶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다시 ‘뜻’을 회복할 수 있다.

  • 하루 10분이라도, 스스로의 질문에 답해보는 습관: “나는 왜 이 일을 하는가?”, “나는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 자기주도적 공부와 성찰의 시간 확보: 유튜브, 인스타그램보다 깊은 독서와 사유의 공간을 삶 속에 확보하기.
  • 공동체 속에서의 의미 있는 연결: 비슷한 뜻을 가진 사람들과의 소모임, 글쓰기 모임, 철학 세미나 등.

형설지공은 고난의 찬양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뜻을 꺾지 않기 위해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반딧불이든, 노트북이든, 그 안에 스스로의 불빛을 간직하고 있는 한, 우리는 여전히 형설지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뜻을 잃지 않는 사람만이 길을 만들 수 있다

형설지공(螢雪之功)은 옛사람의 고생담이 아니라, 그것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어떤 뜻을 지녔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차윤과 손강이 남긴 불빛은 책을 읽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고, 그은 뜻을 품은 삶의 자세였고, 세상에 휘둘리지 않겠다는 내면의 선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종류의 어둠 속을 걷고 있다. 정보는 넘쳐나지만 방향은 희미하고, 기술은 발달했지만 마음은 공허하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밝은 조명도, 더 빠른 인터넷도 아니다.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뜻을 품고 견디는 힘, 곧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가장 본질적인 물음에 충실한 삶이다.

 

형설지공의 정신은, 그 고사를 잊지 않고 되새기는 모든 사람 안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의 어두운 방 안에서도, 새벽의 적막 속에서도,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순간에도 꺼지지 않는 작은 불빛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불빛을 통해, 가난과 환경을 넘어 진짜 삶의 성취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질문은 이것이다.

“당신은 무엇을 향해 살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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