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공이산(愚公移山), 바보의 길을 걷는 자만이 태산을 넘는다

“바보 같은 짓이야.” 누군가 무모한 시도를 할 때 흔히 듣는 말이다. 그 말 속에는 실패의 예감, 비효율에 대한 경멸, 그리고 현실 앞에서 순응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일종의 ‘합리성’이 들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합리적인 포기’보다 더 위대한 ‘어리석은 시도’가 세상을 바꾸었다는 사실을 잊는다.

 

고전 속에는 그런 어리석음을 품은 위대한 이야기가 있다. 바로 우공이산(愚公移山). 이 고사는 노자나 장자와 같은 도가 사상에 뿌리를 둔 설화로, 나이 든 우공(愚公)이 집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산을 옮기기로 결심하면서 시작된다. 사람들은 그를 비웃는다. “그 많은 흙과 돌을 언제 다 옮기겠소?” 그러나 우공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늙었지만, 내 자손은 무궁하다. 우리는 언젠가 이 산을 옮길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핵심은 ‘가능성’이 아니다. 그것은 신념과 끈기, 그리고 인간 의지의 지속성이다. 마치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磨斧作針)는 말처럼, 고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끝까지 뜻을 놓지 않는 태도는 수많은 고사성어 속에서 반복적으로 찬양된다. 철저성침(鐵杵成針), 진합태산(塵合泰山) 모두 이와 같은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현실을 보라”고. “효율을 생각하라”고.

그러나 정말로, 산을 옮기는 어리석음은 시대착오적인 헛수고일 뿐일까?

아니면, 바로 그런 어리석음 속에 인간다움이 살아 숨 쉬는 것일까?

 

이 글은 우공이산을 중심으로, 끈기와 의지의 본질을 조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렇게 묻는다: 지금 당신은, 당신 삶의 산을 옮기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거기 두기로 결심했는가?

 

어리석음이 위대해지는 순간: 우공의 이름에 숨겨진 철학

‘우공이산(愚公移山)’은 네 글자로 구성된 짧은 말이지만, 그 속에는 인간 정신의 깊은 층위가 녹아 있다. 먼저, 이 말을 구성하는 한자 하나하나를 살펴보자.

  • 愚(우): 어리석을 우. 일반적으로 지혜롭지 못하고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상태를 뜻한다.
  • 公(공): 공평할 공. 여기서는 인물의 이름인 ‘우공(愚公)’으로 쓰인다. ‘공(公)’이라는 호칭은 존경을 담고 있어, ‘어리석은 영감’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는다.
  • 移(이): 옮길 이. 물리적인 이동뿐 아니라, 정신적/철학적 의미에서도 ‘변화’를 내포한다.
  • 山(산): 산. 움직일 수 없는 절대적 존재처럼 여겨지는 대상.

이 고사는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처음 등장한다. 늙은 우공이 집 앞을 가로막은 태행산과 왕옥산을 옮기겠다고 결심하자,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지수(智叟)’가 비웃는다. 그러나 우공은 말한다. “나는 죽을지 몰라도, 내 자손이 이어가리니, 언젠가는 산이 없어질 것이다.” 이 이야기의 클라이맥스는 천제(天帝)가 그의 진심을 감동하여 신을 보내 산을 옮기게 한 장면이다.

이 고사의 핵심은 ‘愚(우)’라는 글자에 담겨 있다. 겉보기엔 어리석어 보인다. 현실을 외면하고 비효율적인 방식을 고수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 속에는 지속성과 진심, 미래를 향한 책임감이 숨어 있다. 여기서 우공의 ‘愚’는 단순한 지적 결핍이 아니다. 그것은 즉각적 효율과 맞서 싸우는 철학적 저항이다.

 

현대 사회는 ‘스마트함’을 찬양한다. 빠르고 효율적이며, 결과 중심적인 사고가 지배한다. 그 안에서 ‘바보 같은 끈기’는 종종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오히려 지금 이 시대야말로 우공이산이 필요하다. 수많은 좌절 속에서도, 당장의 성과가 없더라도, 스스로의 믿음을 버리지 않는 의지.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위대한 끈기다.

 

이제 질문해보자. 당신은 지금 어떤 산을 마주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앞에서, 당신은 ‘지수(智叟)’처럼 비웃고 있는가, 아니면 ‘우공(愚公)’처럼 삽을 들고 있는가?

 

우공처럼 살아가는 법: 실패와 반복 속에 깃든 존엄

서울 강남의 한 스타트업 사무실, 밤 11시.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 한 구석에 남아 있던 30대 초반의 창업가는 회의록을 다시 읽고 있다. 지난 3년간 세 번의 실패. 자금난, 투자 무산, 팀 해체. 그는 종종 주변에서 이렇게 들었다. “그쯤이면 접어야 하는 거 아냐?” “너무 끈질기다 못해 미련한 거지.” 그는 웃는다. “그래요. 저는 좀 우공 같아요. 산을 옮기는 심정이죠.”

이 창업가는 ‘산’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시장의 벽, 기술의 한계, 그리고 사람들의 냉소였다. 그러나 그가 옮기려는 진짜 산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 안의 포기하고 싶은 마음, 세상에 대한 불신,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으려는 체념이었다.

 

고전이 말하는 우공이산은 물리적 노력의 서사가 아니다. 그것은 내면의 깊은 저항, 즉 “나는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더라도, 이 길을 걸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자기 선언이다. 실패를 견디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바보처럼 보이지만 가장 인간다운 태도다.

 

지금의 우리는 빠른 성공을 추구한다. 며칠 만에 팔로워 수를 늘리고, 몇 달 안에 ROI(투자 대비 수익률)를 계산하고, 1년 안에 성과가 없으면 과감히 ‘피벗(pivot)’한다. 그러나 이런 문화 속에서 놓치는 것이 있다. 바로 시간의 철학이다. 인간의 깊은 변화와 성장은, 때로는 너무 느려서, 측정조차 불가능한 방식으로 일어난다.

 

우공이산이 주는 진정한 교훈은 이것이다: 모든 것이 실패처럼 보이는 그 순간에도, 우리는 계속 삽을 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산은 언젠가는 옮겨질 것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을 통해 나 자신이 변해간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계획도, 화려한 전략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작은 삽 하나, 그리고 매일 그것을 들어 올릴 마음의 힘이다.

산을 옮기는 건 혼자만의 일이 아니다: 연대, 구조, 실존의 끈기

우공의 이야기가 더욱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단지 한 노인의 고집에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산을 옮기려다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 뜻은 자손에게 계승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우공이 옮기려 했던 것은 산이지만, 사실은 그 뜻과 의지를 다음 세대로 옮기려 한 것이다.

 

이는 단지 끈기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 간 신념의 연대다. 내가 끝내지 못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뜻을 이어갈 수 있다는 믿음은 오늘날 우리가 교육, 시민운동, 환경 보호와 같은 문제를 대하는 자세와도 닮아 있다. 변화는 하루아침에 오지 않지만, 지속적인 신념은 세상을 움직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각해보자. 우공이 옮기려 한 ‘산’은 진짜 돌덩이였을까?

아니면, 그것은 인간이 만든 경계와 불가능의 상징이었을까? 오늘날 우리 앞의 산은 더욱 거대하다. 불평등한 교육 기회, 고착화된 계급 구조, 청년 실업과 같은 구조적 문제들은 단지 개인의 노력을 넘는 문제들이다. 그 앞에서 우리 모두는 다시 묻는다. “이걸 정말 옮길 수 있을까?”

 

그렇기에 우공이산은 단순한 자기계발의 고사가 아니다. 그것은 구조를 흔드는 사유의 시작점이며,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향해 묵묵히 다가가는 인간 존재의 철학적 선언이다.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 내가 그 행위를 계속 택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삶의 긍정이다.

 

우공은 산을 옮기겠다고 결심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긍정했다. 그는 오늘 하루의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길이 옳다”는 확신과 그것을 향한 걸음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어 보이지만, 가장 위대한 삶의 자세다.

바보처럼 산을 옮기겠다는 결심, 그 속에 인간이 있다

우공이산, 바보 같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 ‘바보스러움’ 속에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위대함이 숨어 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과업 앞에서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걸겠다는 결심은 이성적인 계산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용기다. 그것은 효율로는 환산되지 않는 믿음,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신념의 힘이다.

 

우공은 실패를 고려하지 않았다. 그는 완성보다 방향을 택했다. 그가 옮기려 했던 산은 현실의 장벽이자, 인간 내면의 체념이었고, 시대의 냉소였다. 오늘날 우리도 각자의 산을 마주하고 있다. 끝나지 않는 경쟁, 굳어버린 사회 구조, 나약한 내면. 그 앞에서 포기할 수도 있고, 삽을 들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당장의 성공이 아니다. 삽을 드는 순간, 우리는 이미 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삶의 자세는 조용히 다른 이들에게 전염된다. 연대는 그렇게 시작된다. 뜻은 그렇게 전해진다.

 

우공이산은 단지 ‘할 수 있다’는 메시지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은 안 되더라도, 나는 오늘도 이 길을 걷겠다”는 결연한 선언이다. 시대가 얼마나 냉소적이든, 얼마나 실패를 조롱하든, 우리는 여전히 산을 옮기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다시 묻는다.


당신 앞의 산은 무엇인가?
그리고 당신은 오늘, 그 산을 옮길 첫 삽을 들 준비가 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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